가자미 아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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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가자미 아키라는 일본의 정치인, 언론인이다. 이바라키현 출신으로 와세다 대학을 졸업하고, 아사히 신문 기자로 활동했다. 1930년 입헌민정당 소속으로 중의원 의원에 당선된 후, 내각관방장관, 법무대신을 역임했다. 제2차 세계 대전 후 공직에서 추방되었다가 복귀하여 일본 사회당에서 활동했으며, 세계 헌법 초안 작성에 참여했다. 1961년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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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자미 아키라 | |
---|---|
기본 정보 | |
![]() | |
이름 | 가자미 아키라 |
출생일 | 1886년 2월 12일 |
출생지 | 茨城県도요타 군조소 시미쓰카이도 정 |
사망일 | 1961년 12월 20일 (만 75세) |
사망지 | 알 수 없음 |
학력 | |
출신 학교 | 와세다 대학 |
경력 | |
전직 | 알 수 없음 |
현직 | 알 수 없음 |
소속 정당 | |
소속 정당 | 입헌민정당 (→국민동맹) →일본사회당 |
훈장 | |
훈장 | 정3위, 훈1등 서보장 |
가족 | |
친족 (정치가) | 알 수 없음 |
배우자 | 알 수 없음 |
정치 경력 | |
직책 | 제41대 사법대신 |
내각 | 제2차 고노에 내각 |
임기 시작 | 1940년 7월 22일 |
임기 종료 | 1940년 12월 21일 |
국가 원수 | 쇼와 천황 |
직책 | 제39대 내각 서기관장 |
내각 | 제1차 고노에 내각 |
임기 시작 | 1937년 6월 4일 |
임기 종료 | 1939년 1월 4일 |
국가 원수 | 쇼와 천황 |
국회 의원 | |
직책 | 중의원 의원 |
선거구 | (구 이바라키 3구(전전 중선거구)→) 구 이바라키 3구 |
당선 횟수 | 9회 |
임기 시작 | 1930년 - 1942년 1952년 |
임기 종료 | 1961년 12월 20일 |
2. 생애
가자미 아키라는 이바라키현 미쓰카이도(현재의 조소시)에서 태어나, 1905년 와세다 대학에 입학했다. 졸업 후 아사히 신문, 고쿠사이 통신, 시나노 마이니치 신문 등에서 기자로 활동했다.[2]
1928년 보통 선거에 처음 출마했으나 낙선했고, 1930년 입헌민정당 소속으로 중의원 의원에 처음 당선되었다. 1932년 국민 동맹에 합류했다가 1936년 탈당하여 무소속이 되었다.[2] 1937년 제1차 고노에 내각에서 내각관방장관을, 1940년 제2차 고노에 내각에서는 법무대신을 역임했으나, 5개월 만에 사임했다.[1][2] 쇼와 연구회의 일원이었다.[3]
정계 은퇴 후 농사를 짓다가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후 공직 추방되었다가 1951년 해제되었다.[2] 1952년 무소속으로 중의원 의원에 당선되어 정계에 복귀, 1955년 일본 사회당에 입당했다. 1960년 안보 투쟁에 참여했다.[2]
세계 헌법 초안 작성을 위한 회의 소집에 동의한 서명자 중 한 명이었다.[4][5]
2. 1. 초기 생애 및 언론 활동 (1886~1928)
1886년 이바라키현 미쓰카이도(현재의 조소시)의 농가에서 태어났다. 와세다 대학 정치경제학부를 졸업하고, 아사히 신문, 국제통신 등에서 기자로 활동했다.[2] 시나노 마이니치 신문 주필 시절에는 노동자나 농민의 편에서 논조를 펼쳤다. 재일 캐나다인 선교사 다니엘 노먼과 가족끼리 교류했다.1886년 이바라키현 도요다군 미카이도정(현 조소시) 다카노의 농가에서 2남 3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1898년 구제 쓰치우라 중학교(현재의 이바라키현립 쓰치우라 제1고등학교)에 입학했는데, 가자미는 입학자 중 최연소였다. 이후 구제 시모쓰마 중학교(현재의 이바라키현립 시모쓰마 제1고등학교)로 전학했으나, 야구 경기 관람 문제로 교장 배척 운동에 가담하여 퇴학당했다. 그 후 구제 미카이도 중학교(현재의 이바라키현립 미카이도 제1고등학교)에 편입하여 졸업했다.
와세다 대학 예과에 입학하여 웅변회에서 활동하며 나카노 세이고, 오가타 다케토라 등과 친분을 맺었다. 예과 졸업 후, 와세다 대학교 정치경제학부 정치학과에 진학했다.
1909년 와세다 대학 정치경제학부를 졸업하고, 국제 통신, 아사히 신문 기자 등을 거쳐, 1923년부터 5년간 시나노 마이니치 신문 주필로 재직했다. 1927년 오카야 제사 파업에 가담하여 노동자와 농민을 옹호하는 논조를 펼쳤으며, 같은 해 12월부터 이듬해 1월까지 "마르크스에 대해"라는 기명 기사를 통해 공산당 선언을 소개하기도 했다.[2]
2. 2. 정계 입문과 활동 (1928~1945)
1928년 시나노 마이니치 신문을 퇴사하고 제16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 이바라키현 제3구에서 출마했지만 낙선했다.[2] 1930년 제17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입헌민정당 소속으로 최고 득표를 기록하며 당선되었고, 이후 4회 연속 당선되었다.[2] 1931년 11월 21일 아다치 겐조의 성명을 기초했다.[2] 협력 내각 운동의 실패로 1932년에는 탈당하여 국민동맹에 참가했다.[2]1936년 6월, 다키 마사오 등과 함께 국책 연구회를 발족했다. 각 당, 각 파의 중견 의원들에 의한 횡단적, 무정파에 의한 연구회였다.[8]
제1차 고노에 내각 발족 몇 달 전, 쇼와 연구회의 중국 문제 연구회 위원장에 취임했다. 1937년 6월 4일 제1차 고노에 내각이 성립되자, 총리가 된 고노에 후미마로는 당시 전혀 면식이 없던 가자미를 내각서기관장으로 발탁했다. 가자미는 중일 관계 개선을 목표로 했지만, 같은 해 7월 7일에 루거우차오 사건이 발발했다. 당시 참모총장은 황족인 간인노미야 고토히토 친왕이었고, 참모차장 이마이 기요시와 중국 주둔군 사령관 다시로 와니치로는 모두 병석에 있었기 때문에, 육군이 조직의 기능 부전으로 인해 전선 확대를 소극적으로 하고 있었다. 당초 고노에 내각은 불확대를 주장하여 7월 11일에는 현지에서 평화가 성립했지만, 이날 각의 후에 가자미는 아사히 신문, 요미우리 신문 등 보도진 대표와 정재계 각 방면의 유력자를 관저로 초청했다. 여기서 고노에는 내지 3개 사단을 파병하는 북지 파병 성명을 발표하여, 평화 교섭을 파괴했다. 이후에도 고노에 내각은 불확대 방침을 내걸면서, 7월 17일에는 1000만엔이 넘는 예비비 지출을 각의에서 결정했고, 7월 26일에는 육군이 요구하지 않은 9700만엔이 넘는 제1차 북지 사변비 예산안을 각의에서 결정했으며, 7월 31일에는 4억엔이 넘는 제2차 북지 사변비 예산을 추가하는 등, 육군을 사변 확대의 방향으로 압박했다.
1940년 5월, 고노에를 당수로 하는 신당 결성을 목표로 하는 신체제 운동을 아리마 요리야스 등과 함께 시작했다. 고노에 후미마로, 기도 고이치, 아리마 요리야스 3명이 5월 26일자로 「신당 수립에 관한 각서」를 작성했을 때에는, 기존 정당을 모두 말소할 것을 진언했다. 고노에가 이에 찬동하여, 7월에 발족한 제2차 고노에 내각에서 가자미를 법무대신으로 삼았다. 특히 입헌정우회 (분열 중)·입헌민정당의 2대 정당에 내분을 일으켜, 동당을 해산으로 몰아넣는 정치 공작 (가자미와 아리마 등은 이를 「정당 폭파 공작」이라고 칭했다)은, 사후 유족의 호의에 의해 역사학자에게 공개된 『가자미 아키라 일기』에 의해 알려지게 되었다. 운동이 10월 대정익찬회 결성에 이르자, 가자미는 12월에 대신을 사임했다. 서기관장 취임 이전부터의 친우이자, 서기관장 시절에 가자미가 내각의 촉탁으로 발탁한 오자키 호쓰미가 1941년 10월 조르제 사건으로 체포되어, 가자미 자신도 증인으로 검찰 당국의 심문을 받는 등 사회적으로 곤경에 처해진 일도 있어, 1942년 4월 익찬 선거에 익찬 정치 체제 협의회의 추천을 받았지만, 총선거 중에 입후보를 사퇴했다. 그 후 귀농했다.
2. 3. 전후 활동 (1945~1961)
1946년 GHQ에 의해 공직 추방 처분을 받았다.[2] 1951년 추방이 해제된 후, 1952년 제25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 무소속으로 당선되어 정계에 복귀했다.[2] 1954년 1월 헌법 옹호 국민 연합의 대표위원이 되었고, 1955년 1월 좌파 사회당에 입당하여, 10월 좌우 사회당 통합 시 당 고문이 되었다.[2] 일소 협회 부회장, 일중 국교 회복 국민 회의 이사장, 아시아·아프리카 연대 위원회 대표 위원, 세계 평화 평의회 평의원으로 활동하며 평화 운동에 참여했다.1957년 저우언라이와 회담하기 위해 중국을 방문했다. 기시 노부스케 내각의 타이완 정권 지지 및 나가사키 국기 사건에 반발하여 1958년 7월 14일 나카지마 겐조, 호소카와 가로쿠, 이토 다케오와 함께 중국에 대한 "침략"에 대한 "반성 성명"을 발표했다.
1959년부터 건강이 악화되었고, 이듬해 9번째 당선을 이뤘지만, 1961년 12월 20일 사망했다.[2]
3. 평가
가자미 아키라는 언론인 시절 노동자와 농민을 대변하는 진보적인 목소리를 내며, 일본의 평화 운동과 민주주의 발전에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러나 중일 전쟁 초기 일본의 강경 정책을 주도하여 전쟁 확대에 책임이 있다는 비판과 신체제 운동 당시 기존 정당 해산을 주도하여 일본의 정치적 다원주의를 훼손했다는 비판도 받는다.[8]
오자키 호츠미가 조르게 사건으로 처형당하면서, 가자미 역시 공산주의자라는 의혹을 받기도 했다.[8]
(한국의 관점) 일제강점기 조선에 대한 억압과 침략 정책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인물로, 한국 역사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3. 1. 긍정적 평가
가자미 아키라는 언론인 시절부터 노동자와 농민을 대변하는 진보적인 목소리를 냈으며, 전후 일본의 평화 운동과 민주주의 발전에 기여했다는 긍정적인 평가를 받는다.[4] 1954년 헌법 옹호 국민 연합의 대표위원이 되었고, 1955년 좌파 사회당에 입당하여 당 고문을 역임했다.[4] 일소 협회 부회장, 일중 국교 회복 국민 회의 이사장, 아시아·아프리카 연대 위원회 대표 위원, 세계 평화 평의회 평의원으로 활동하며 국제 평화와 연대에도 힘썼다.[4]1957년 저우언라이와 회담했고, 1958년에는 나가사키 국기 사건에 대해 중국에 대한 "침략"에 대한 "반성 성명"을 발표하기도 했다.[4]
3. 2. 부정적 평가
중일 전쟁 초기 일본의 강경 정책을 주도하여 전쟁 확대에 책임이 있다는 비판을 받는다.[8] 제1차 고노에 내각의 내각서기관장 시절, 루거우차오 사건 발생 이후 일본 정부와 군부는 초기에 불확대 방침을 표명하고 현지에서 평화 협상이 진행 중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고노에 후미마로 총리와 함께 언론과 정재계 유력 인사들을 동원하여 북지 파병 성명을 발표하고, 거액의 군사 예산을 잇따라 의결하여 전쟁 확대를 주도했다.1940년 신체제 운동 당시, 기존 정당 해산을 주도하여 일본의 정치적 다원주의를 훼손했다는 비판을 받는다.[8] 아리마 요리야스 등과 함께 고노에 후미마로를 당수로 하는 신당 결성을 추진하면서, 기존 정당들을 해산시키고 대정익찬회를 결성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특히 입헌정우회와 입헌 민정당 등 양대 정당에 내분을 일으켜 해산을 유도하는 정치 공작을 주도했다는 사실이 『가자미 아키라 일기』를 통해 밝혀지기도 했다.
그의 절친이었던 오자키 호츠미가 조르게 사건으로 처형당하면서, 가자미 역시 공산주의자라는 의혹을 받기도 했다.[8] 오자키 호츠미는 가자미의 추천으로 총리 고노에 후미마로의 촉탁이 되었으나, 조르게 사건으로 체포되어 처형되었다. 이 사건으로 인해 가자미 역시 공산주의자로 의심받아 검찰의 심문을 받는 등 곤경에 처하기도 했다.
(한국의 관점) 일제강점기 조선에 대한 억압과 침략 정책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인물로, 한국 역사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4. 기타
시라스 지로의 별저 부소소의 한 방에는 지금도 가자미의 "부소소" 현판이 걸려 있다. 이와테현 기타카미시의 관광 명소 텐쇼치는 가자미가 지은 이름이다. 구로사와지리정 정장이 되는 사와토 고지가 기타카미강을 따라 벚꽃 나무를 심는 것을 구상하면서, 벚꽃을 심는 모임의 명칭에 대해 가자미에게 상담했다. 가자미는 현지에 가서 진가오카에 올라, 이곳의 경치가 훌륭하고 전망이 좋은 명승지라는 의미에서 "전(展)"과 "승(勝)"을 따서 "텐쇼회(展勝会)"라고 이름 지었다. 그곳에서부터 그 지역을 "텐쇼치(展勝地)"라고 부르게 되었다.[14]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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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me
1937-06-14
[2]
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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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hōgakk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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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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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7-15
[7]
서적
近衛文麿 野望と挫折
WA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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改造
195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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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서적
昭和史探訪2
[12]
논문
父・風見章を語る--風見博太郎氏に聞く(その1)
2005
[13]
논문
父・風見章を語る--風見博太郎氏に聞く(その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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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웹사이트
北上展勝地の歴史
https://kitakami-k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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